교수님 질문이 있는데요...(윤촌)
이름: 晴野
2005/5/21(토)
Re..교수님 질문이 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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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수님 질문이 있는데요... - 윤촌 ┼

│ 교수님 안녕하세요?

│ 교수님께 수업 들은 내용을 정리하다가 잘 모르겠는 부분이 있어 질문 드립니다.

│ 임무(性)를 부여받는 心과 심통성정에서의 심은 어떻게 다른 것 입니까?

│ 제가 필기를 잘못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 제가 필기한 것에 의하면 性=理, 心=氣라고 적어놓았더라구요.

│ 근데 또 그 밑에는 쓰여있는 것은

│ 心에는 性과 情이 있고 심은 성과 정을 통솔한다(心統性情)라고 적혀있는데...

│ 임무를 받는 기적인 측면의 심과 성과 정을 통솔하는 심이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 입니까?

│ 성과 심의 문제에서는 성은 심보다 우위개념인것 같고

│ 심통성정의 문제에 있어서는 심이 성보다 우위개념인것 같은데...

│ 두 가지 문제에 있어서 성이 모두 理라는 것은 알겠지만 심의 의미는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 무지한 저를 용서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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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질문 내용이 모두 맞습니다. 모두 바르게 알고 있습니다. 즉 心統性情의 心이나 心性의 心이나 같은 心이며, 다르지 않습니다. 또 심과 성에서, 심은 氣이고 성은 理이므로 심은 성의 주재하에 있습니다.  그러나 性은 形而上者로서 형체나 운동성 등이 없으므로 氣인 心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도록 지시하거나 조종할 수는 없습니다. 단지 심이 나아갈 방향을 지정할 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性이 心을 주재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性에는 사랑하는 仁德이 있는데, 이것은 심으로 하여금 他者를 사랑하도록 합니다. 즉 그 성 때문에 심은 타자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결국 심은 성의 지시를 받아 그것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한편 그런 심은 작용성을 가진 기로서 상황을 지각/판단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심은 성이 지시한 사랑을 어떻게 하면 잘 실현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여 그것을 잘 실현하도록 노력합니다. 이런 심의 노력에 의하여 성, 즉 사랑하는 임무는 실현됩니다. 이것을 심통성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심에 임무가 부여된다고 하니까 심에 어떤 변화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은데, 심 자체에는 변화가 없습니다. 그릇에 물을 담더라도 그릇이 달라지는 것은 아닌 것처럼.... 또 그릇에 물을 담으면 그 그릇은 물을 잘 간직해야하고, 또 물을 따를 일이 있으면 잘 조종하여 엎지르지 않고 잘 따라야 하지요. 즉 그릇에 담겨 있는 물을 성이라 하고, 따라지고 있는 물을 情이라 하며, 그 물을 담고 있거나 따르는 그릇은 심입니다. 그릇보다 물이 중요하지만(성의 주재) 그릇이 아니면 담을 수도 따를 수도 없으니 심통성정입니다. 여기서 비유한 물을 성(그 구체적인 임무인 사랑)으로 바꾸고, 그릇을 심으로 바꾸어 생각해 보세요. 또 심이란 용어를 사람 혹은 나로 바꾸어 생각해 보세요.(심은 나를 대표하니까....)


│ 그리고 죄송하지만 한 가지 더 질문 드리고 싶은 것이 있는데요...

│ 퇴계의 철학을 보다 보니까 다른 책에서는 퇴계가 理의 능동성을 주장했다고 하는데...

│ 제가 교수님께 배운 바로는 이가 심에 도달했다... 이가 심을 깨우치게 한다라고 알고 있는데...

│ 이것이 理의 능동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까?

│ 제가 퇴계의 철학에 관련된 책 세권을 봤는데 모두 이렇게 쓰여있어서 그것이 옳은 것 같기도 하고

│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이는 조금 다른 것 같기도 하고...

│ 다른 책에 보면 퇴계는 이의 능동성을 인정하고 율곡은 이의 능동성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쓰여있던데...

│ 이도설을 굳이 이의 능동적인 측면이라고 해석해도 좋은지 궁금해서 질문 드립니다.

│ 제가 생각하기엔 이가 능동적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감화역할을 하는 것 같은데...

│ 저의 생각이 틀린 것 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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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이 역시 학생이 알고 있는 것이 대체로 맞습니다. 지금 대부분 퇴계가 리의 능동성을 인정한 것처럼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상당히 주의해야 합니다. 그 능동성이 '기의 운동성'과 다르지 않은 것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리의 능동성과 기의 능동성의 같은 점이나 다른 점을 분명히 말하지 않은 채, 리의 능동성을 말합니다. 즉 퇴계의 리는 기와 어떻게 다른 지를 먼저 해명해야 하는 문제를 소홀히 한 채 리의 능동성만을 주장하면 퇴계의 리는 기와 같아집니다. 그것은 곤란하겠지요. 이 부분에 대해서 분명히 설명된 책이 있으면 내게도 가르쳐 주세요.

理到說과 理發說은 그 방향이 다릅니다. 즉 리발설은 나의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것이고, 리도설은 반대로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즉 리발설에서의 리는 나의 리이고, 리도설의 리는 사물의 리입니다. 이에 퇴계선생도 이 두 문제를 연결하지 않고 별도로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학자들은 그 둘을 한 묶음으로 모두 리의 능동성을 인정한 증거로 삼으려고 합니다. 이 문제 역시 더 생각할 문제입니다.


│ 마지막으로 교과서를 보니까 주자 부분에서 존양성찰이라는 말이 나온 것 같은데...

│ 존양성찰이 일종의 수기, 그러니까 수양론이라고 할 수 있는 건가요?

│ 존양성찰의 의미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아서 질문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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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역시 맞습니다. 존양성찰은 수양, 즉 修己의 한 방법입니다. 좀더 설명하자면 존양성찰은 다시 둘로 나누어집니다. 존양은 아직 어떤 일을 하지 않을 때에 자신이 본래 가지고 있는 심(마음)을 보존하고 性을  간직(기름)하는 것이고, 성찰은 어떤 일을 하면서 항상 조심하고 잘못이 없도록 살피는 것입니다. 다만 이 양자는 서로 도움이 됩니다. 존양을 잘하면 성찰을 잘 할 수 있고, 성찰을 잘 하면 다시 존양을 잘 할 수 있습니다.

│ 
│ 혼자서 며칠동안 고민해도 잘 이해가 되지않고,

│ 다른 책을 봐도 솔직히 무슨 말인지 알듯도 하고 모를 듯도 해서 질문드립니다...

┼ 부족한 저를 용서해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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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모르는 것을 쌓아 두면 병이 됩니다. 그리고 학문의 발전도 없습니다. 언제든지 질문을 하세요. 학교에서도, 전화로도, 모두 가능합니다. 답변이 미흡하면 다시 질문을 올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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