倫村에 들어서며(93년 11월)

계유년 초여름 성신여자대학교 교무과로부터 교수초빙 예정자로 결정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대학에 입학한 후로 15년동안 그 얼마나 기다리던 소식인가. 이에 지나간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법대나 상대에 가서 출세하라는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동국대 철학과에 입학할 때 나는 결심했었다. 동양철학을 먼저 공부한 다음 그 위에 서양철학을 가미하여 세계의 철학을 하나로 통일하여, 세계 제일의 철학자가 되리라. 그리하여 온 인류의 등불이 되자.

나는 7살 때부터 국민학교 5학년 때까지 이웃마을에 사시던 成夏順 선생님으로부터 千字文, 啓蒙篇, 明心寶鑑, 小學을 배웠다. 어릴 때는 그저 외우는 것으로 한문을 공부하였으나 암기과목보다 수학을 더 잘한 나는 이제 방법을 바꿔 문법을 따져 한문에 접근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당시 시중에 있던 한문 문법서를 모두 구해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漢文新講(李家源 著)을 여러번 읽었고 아울러 다른 책을 참고하였다. 책을 한 권 뗄 때마다 한문 원전을 가져다가 해석해 보았다. 그러나 문법책에서 공부한 것이 적용되지 않는 것이 많았고, 그 때마다 국문과 李鍾燦(이종찬) 교수님께 들고 가서 어떻게 적용시켜야 할 것인지를 여쭤 보았다. 교수님께서는 늘 자상하게 가르쳐 주셨으나, 때론 한문은 문법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것이 많으므로 문법에 얽매이면 안된다고 크게 꾸중하셨다. 그럴 때면 교수님 연구실을 물러 나와 방황하였다. 한문 책을 던져버린 적도 수없이 많았다. 그러나 처음의 결심을 포기할 수 없어 다시 문법책을 들고 공부했다. 대학을 졸업할 즈음에야 교수님께서는 "웬만하다"고 평해주셨다.

한문 공부를 하는 한편 1학년 2학기 때 우연한 인연으로 알게 된 재야의 李鍾述(이종술) 선생님으로부터 토요일마다 論語와 周易을 배웠다. 주로 내가 해석하고 잘못된 것만을 지적해 주셨으며, 性理學과 관련해서는 나의 질문에만 답변하셨다. 그것도 질문한 범위 안에서만 답변이 주어졌다. 때로는 야속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좀더 속시원히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고 가르쳐 주시면 쉽게 문제가 풀릴 것 같은데, 한번도 그런 적이 없으셨다. 학위 논문을 쓰면서 그토록 방황하고 고민할 때도 선생님께서는 한번도 시원스럽게 강의해 주신 적이 없으셨다. 그러나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선생님의 방법이 옳았다. 그것은 모르는 것은 모르지만 아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게 하는 방법이고, 자기 견해를 가질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이며, 나아가 스승을 넘어설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두 분 은사님께 많은 빚을 지고 있다. 교수님께서는 그토록 성가시게 구는 나를 한 번도 물리치지 않으시고 가르쳐 주셨으나 나는 제자가 되지 않고 미운 오리새끼가 되어 철학으로 돌아왔고, 선생님께서는 철부지 어린 제자의 철없는 생각도 꺽지 않으시고 한 가닥 한 가닥 풀어서 내 주장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셨으나, 아직도 그 높으신 학문과 인격의 만분의 일도 배우지 못하였다. 나는 영원히 두 분 은사님의 죄인이다.

교수가 되던날, 언젠가 교수님께서 "제자는 키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크는 것이다."고 하신 말씀이 생각났다. 그렇다. 갓난애가 말을 배우려고 웅얼거릴 때마다 엄마는 한 마디씩 가르쳐준다. 그 애가 말배우기를 포기하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엄만들 어떻게 가르치겠는가. 그런 의미라면 나도 스스로 컸다. 그러나 엄마의 도움없이 말을 배울 수 없듯이 나는 두 은사님의 도움으로 컸다.

倫村에 들어서며 몇가지 질문을 던져 본다.

크려는 제자가 있을 때 나의 그늘에서 자라게 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과연 한 줌의 거름이라도 줄 수 있을 것인가? 그것도 못하면 어둔 밤길을 혼자서 가는 제자에게 횃불잡이라도 되어줄 수 있을 것인가?

그러고도 東西의 哲學을 하나로 통일하려는 꿈을 과연 이룰 수 있을 것인가? 온 인류에게, 나아가 우주안 삼라만상에게 희망을 줄 대안이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