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철학사상 부재의 시대 (supil)

No,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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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사상 부재의 시대

윤용남(윤리교육과)

1945년 8월 15일 광복과 더불어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념 논쟁은 치열해졌고, 그 이후 90년대 초까지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이념논쟁은 지속되었다. 광복직후의 논쟁은 우리 사회가 아직 어느 사상을 기반으로 할 것인지 확립하지 못한 상황에서 서로 기득권을 확보하려는 싸움이었고, 그후 민주주의가 대세를 이루면서부터는 민주화 투쟁이 일어났는데, 그 때 민주투사 중 극히 일부 사람들이 민주주의가 아닌 공산주의를 사상적 기반으로 함으로써 논쟁이 일어났다. 그러던 것이 대내적으로는 정통성을 확보한 민주정부가 들어섰고, 대외적으로는 공산주의의 종주국이라 할 소련이 붕괴되고, 중국도 개혁개방으로 나가면서 민주와 공산의 우열이 가시화되면서 공산주의자들은 더 이상 자신의 사상을 대중에게 드러내 놓고 말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이로써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민주와 공산의 이념논쟁은 그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그 자리를 정치체제로는 민주주의가, 경제체제로는 자본주의가 독점하였다. 이제 민주자본주의가 세계질서를 지배하게 되었다.

매우 영특하고 발빠른 사람들은 이런 세상이 도래한 것을 동물적인 감각으로 느끼고, 그에 적응해 가고 있다. 특별히 다른 대안이 있어 그 대세를 거스릴 힘이 있는 것도 아니고, 먹지 않으면 먹히는 정글의 법칙이 공평하지 못하다고 투덜거려 봤자 단지 약자의 넋두리에 불과하다는 것도 잘 안다. 광야에 내던져진 채로 어느 한편이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하는 싸움에서 죽지 않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다.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비장의 무기일 뿐이지, 그 무기를 누가 어디서 어떻게 왜 만들었는가를 따질 만큼 한가롭지 않다. 또 상대를 죽이는 것은 정당한가, 뒤에서 찔러도 되는가, 조는 사이에 찔러도 되는가 등을 생각할 겨를도 없다. 이런 생각에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다가는 죽음만이 돌아올 뿐이라는 것도 안다.

민주주의는 자유와 평등, 평화 등을 그 이념으로 한다던데 왜 이토록 선혈이 낭자한 세상이 되었는가? 자본주의는 나의 자본 축적과 그 소유를 인정한다고 하던데 왜 그토록 집요하게 뺐아 가려고 하는가? 왜 이토록 몸서리쳐지는 판이 벌어졌는가?

그렇다, 철학은 판이다. 장기판이요 바둑판이다. 장기를 잘 두는 사람은 장기판에서 내기를 하고 싶어하고, 바둑을 잘 두는 사람은 바둑판에서 겨루고자 한다. 그런데 이 기세 싸움에서 민주자본판이 득세하였고, 그들에게 유리한 판이 벌어졌다. 그러니 우리 같이 비민주자본판에서 놀던 사람은 우선 상대의 돌이나 말을 잡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그것이 실용적이다. 그런 판을 누가 언제 어디서 왜 만들었는가는 지금 논할 때가 아니다. 옛날 놀던 판을 생각해서도 안된다. 과거에 잘 나가던 시절을 돌아보는 것은 패배자의 위안이다.

그러나 아무리 바빠도 옛날 판과 어떻게 다른지 정도는 알고 가야 하지 않을까? 그 판이 매끄러운 판인지, 울퉁불퉁한 판인지, 넓은지, 좁은지, 단단한지 말랑한지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국어, 영어, 수학, 역사, 정치, 경제 등의 분과학문에서는 이런 것을 다루지 않는다. 단지 갑옷은 어떻게 입고, 칼은 어떻게 휘두르는지를 이야기 할 뿐, 나와 적이 서 있는 그 판에 대해서는 말이 없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판에서는 무 하나도 자르는 법을 가르치지 않는데 왜 배워야 하는가]라고 한다.

자, 생각해보자.
우리나라의 민주정치가 제대로 발전하지 못하는 원인을 말할 때면 언제나 소위 연고주의를 들먹거린다. 그러면서 짐짓 심각한 어조로 파당짓기를 좋아하는 우리의 민족성이 문제라고 한다. 또 어떤 이는 유교의 가족중심주의를 탓한다. 그들의 말은 모두 옳다. 그러나 완전히 판이 달라진 것은 모르고, 지엽말단적인 것을 들먹거리는 것이다. 유교주의 국가에서는 그런 것이 최고의 미덕이고, 반드시 필요한 교육 방법이다. 유교주의는 끈끈한 사랑으로 판을 만들었다. 공자의 인(仁)사상이 그것이다. 이 사랑을 말할 때는 가까이 눈에 보이는 사람부터 사랑하라고 해야 쉽게 이해할 수 있고 잘 실천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가족, 친척, 동향, 동창을 먼저 말하는 것이다. 눈앞에 보이는 가족이나 이웃사람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보이지도 않는 타향사람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민주자본판은 자기의 이익으로 만든 판이다. 이는 남과 남 사이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가족 간에도 친척간에도 이웃 간에도 모두 그렇다. 내 주위의 모든 사람, 나아가 자연까지도 모두가 나의 이익을 위해서 존재해야 하고, 나의 이익을 침해하려고 하면 쟁취해야 한다. 이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프로타고라스가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고 외칠 때부터 이미 시작된 판이다.

서양의 철학적 전통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을 모두 대립갈등의 관계로 보는 것이다. 박진감 넘치고 역동적인 서양철학사가 이를 증명한다. 유심론과 유물론이 대립하고, 일원론과 다원론이, 상대주의와 절대주의가, 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대립하면서 면면히 이어져 왔다. 그러나 공자는 [述而不作(옛 것을 받아 전해줄 뿐 새로 만들지 않는다)] 한마디로 자신의 입장을 대변하였으니, 이는 선배와 대립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양철학사는 엎치락뒤치락하는 맛도 없고 박진감도 없다.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현재는 자기 이익을 앞세운 서양의 철학사상이 압도하고 있다. 그렇다면 나도 실용적으로 말할 수밖에 없다. 진정 민주자본판에서 이기고자 한다면 먼저 털끝만큼이라도 우리의 내면속에 잠재되어 있는 사랑하는 마음, 즉 인정을 발본색원하라. 냉혈인간이 되어라. 이것이 한 철학도가 주는 충고이다. 그런 다음 그런 냉혈인간들이 살아가는 방법을, 아니 판을 짜는 방법을 알고자 한다면 철학책을 보라. 거기에 답이 있다.

그리고 냉혈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불안하고 불편한 사람은 먼저 세상을 걱정하라. 그리고 새 판을 만들어 놓고 기다려라. 머지 않아 온혈동물이 그리워지면 찾아오는 이 있을 것이다.

철학사상은 부재할 수 없다. 단지 느끼지 못할 뿐이요, 생각하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바쁠수록 돌아가라 했다.

성신학보 2001년 11월 5일(41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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