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倫村을 나서며 (supil)

No, 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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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교육과 창립 40주년의 축사를 대신하여
倫村을 나서며

1993년 9월에 윤리교육과에 부임한 이후 어느새 30년이 되어 가고 있다. 정년 퇴임이 내년 8월 말이니, 이제 9개월 정도 남았다. 지난날을 돌아보며, 이 글을 쓰려니 그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그동안 800여 명의 학생이 倫村에서 꿈을 키워나갔다. 지난해까지 335명이 임용시험에 합격하여 국공립학교의 교사가 되었고, 또 상당수의 졸업생이 사립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을 것이다.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55% 정도의 졸업생은 교사의 꿈을 이룬 것 같다. 처음부터 교사에 생각이 없는 15% 정도는 일반직 공무원이나 회사원 등으로 취업하였으니 이들도 윤촌에서 꿈을 이룬 셈이다. 이들을 제외한 약 30%의 졸업생은 그 소식을 잘 모른다. 이들은 첫 꿈을 이루지 못한 것 같다. 나의 도움이 필요했을지도 모르는데 졸업 후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 연락이 끊겼다. 그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어떻게 말로 형용할 수 있겠는가? 1993년 11월 ‘倫村’誌에 ‘倫村에 들어서며’라는 글에서 스스로 한 다짐이 있었다.

“크려는 제자가 있을 때 나의 그늘에서 자라게 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과연 한 줌의 거름이라도 줄 수 있을 것인가? 그것도 못하면 어둔 밤길을 혼자서 가는 제자에게 횃불잡이라도 되어줄 수 있을 것인가?
그러고도 東西의 哲學을 하나로 통일하려는 꿈을 과연 이룰 수 있을 것인가? 온 인류에게, 나아가 우주 안 삼라만상에게 희망을 줄 대안이 있는가?”

몇몇 졸업생이 좀 더 강력하게 학생들을 다그치지 않았다고 원망한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며 그 길을 피하였다. 이제 와서 돌아보니 나의 잘못된 방침은 아니었나 후회해 본다. 성인인 대학생을 내가 어떻게 강제로 끌고 가겠는가? 소를 냇물까지 끌고 가는 것은 목동이 할 수 있지만 물을 먹는 것은 결국 소가 해야 한다고 들었다. 또 나도 논문을 쓰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고도 생각했다. 어쨌든 더 살뜰하게 보살피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이제 와서 후회하고 사과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만은 그래도 그들에게 깊이 사과하고 싶다. 그리고 내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새로운 꿈을 키우고 있을 것으로 믿는다. 새로 하는 일에 항상 가슴 설레고, 맡은 일에 보람을 느끼며, 행복하기를 빌 뿐이다.
대학에 진학할 때부터 불교와 유교를 융합하려고 동국대에 갔고, 그런 다음 동양철학을 바탕으로 세계철학을 세우는 꿈을 꿨었다. 나한테도 젊고 원대한 꿈을 꾸는 청년시절이 있었다고 생각하니 다시 가슴이 뛴다. 그동안 윤촌에서 나도 학문의 꿈을 키웠다. 대학에 갈 때는 불교로 시작해서 유교로 가려고 했는데, 한문 공부를 하다 보니 유교가 먼저 손에 잡혔고, 그러다가 거기서 헤어나지 못하고 지금에 이르렀다. 30여 년 동안 體用論理學을 연구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고, 이제 거의 완성 단계에 도달하였다. 이에 힘입어 성리학도 익어가고 있다. 대학시절부터 고민하며 방황하던 문제가 거의 다 풀렸고, 하나로 꿰어지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음양론이 남았다. 앞으로 몇 년이 더 걸릴지 모르지만 머지않아 해결되길 희망한다. 그날이 되면 동양의 철학과 지혜가 오롯이 밝혀질 것이다.
세계철학을 만드는 것은 이제 필요 없는 것 같다. 동양철학을 잘 모를 때는 융합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체용논리학을 알고 보니 그것은 어렵고 그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체용논리학과 형식논리학은 논리 구조가 서로 다르면서도 모순 없이 양립할 수 있는 논리이다. 아니 각각 장단점이 있기에 두 논리가 모두 필요하다. 또한 철학에서도 동서양 철학은 각각 장단점이 있으므로 무리하게 하나로 융합하려고 애쓰지 말고 양립시키면서 우리의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하나로 통일되거나 융합되게 하는 것이 효과적일 것 같다. 실제 삶 속에서 적용하다 보면 어떻게 사는 것이 더 좋을지 스스로 선택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그것이 자연스러우면서도 인류의 삶을 풍부하게 할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사람들, 특히 서양사람들에게 동양철학을 합리적으로 쉽게 설명할만한 자신감이 생겼다. 서양인이 동양철학을 잘 알고 나면 동양적 삶에 매력을 느끼고 선택하는 사람도 늘어날 것이다.
퇴임 후에는 지금까지 하던 체용논리학과 성리학 연구를 마무리하고, 음양론도 끝까지 완벽하게 밝힐 것이다. 그런 다음에 건강이 허락하는 한 그것을 대중화하고 과학화하는 데 힘을 쏟겠다.
끝으로 30년 동안 항상 내 곁에서 나를 응원해주고, 분에 넘치는 사랑을 베풀어준 윤촌인들에게 감사합니다. 화살같이 지나간 30년 동안 내내 행복하였습니다. 윤촌을 나가더라도 윤촌에서의 행복을 추억하고 자랑하며 살 것입니다. 모든 윤촌인이 항상 건강하고 승승장구하기를 두 손 모아 빕니다.
2022/11/26 제26회 윤촌학술대회 자료집

번호	제 목	조회	추천
85	[청야의 주자철학 연구] 서문	72
84	倫村을 나서며	59
83	학생들이 자유롭게 자랄 자유를 허하라	156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