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청야의 주자철학 연구] 서문 (supil)

No, 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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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序文

아스라한 기억, 6살 때 아버지 따라 어린이용 지게로 흙을 한 삽씩 져 날라 논 합배미치던 일!
국민학교 2학년 때 딱지치기에 정신이 팔려 성적이 떨어져서 엄마한테 크게 혼난 일!
학교 갔다 오면 소 풀 뜯기고, 꼴 베던 일. 그러다가 낫으로 발목을 쳐서 뼈가 보일 정도로 깊이 베인 일!
산에서 장작을 지고 내려오면서 도랑을 건너뛰다가 엎어져서 팔이 부러진 일!
모내기할 때, 지게로 모쟁이 하느라 어깨가 벌겋게 부어서 힘들었던 일!
나는 충남 예산의 산골 마을 외딴집,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중학교는 6km 떨어진 읍내에 있어서 매일 왕복 3시간씩 걸어 다녔다. 부모님은 나를 대전고와 동국대에 유학시켜놓고, 그 뒷바라지에 온갖 고생을 다 하셨다. 농사와 보따리장수로 등록금과 하숙비 등을 대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때는 별로 실감하지 못했다. 부모의 고생은 당연한 일로만 여겼다. 이제 자식을 키우는 아비가 되어 돌아보니 참으로 죄송한 일이다. 상경대나 법대에 가라며 철학과 진학을 반대하시는 부모님 뜻을 어기고, 머리를 싸매고 누워 고집을 부렸다. 자식을 이길 수 없으니 져주시며, 자식의 앞길을 열어주신 부모님께 한없이 고맙지만, 한편으로는 몹시 송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일밖에 모르는 농사꾼 아버지(起字模字)!
장돌뱅이 도라지 장사 어머니(全州李氏會字玉字)!
몸 삭는 줄도 모르고 오로지 자식을 위해 바친 일생!
애틋한 사랑, 숭고한 희생, 후회 없는 일생!
살아생전에 그 은혜 털끝만큼도 갚지 못한 죄인,
자랑스럽고 감사하고 미안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이 작은 책을 아버지, 어머니 영전에 바칩니다.

제 평생 한 것이 이것밖에 되지 못합니다.
키우신 보람있게 크게 빛나야 하는데 너무 초라합니다.
엄마! 그래도 옛날처럼 자랑해 주실 거죠?
아직 풀지 못한 문제는 마저 풀어놓고 갈게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거의 끝나가요.
이제 실마리가 풀렸으니 곧 다 풀릴 거예요.
체용논리학과 성리학은 거의 끝나가고, 음양론도 감은 잡았어요.

7살 때 지혜로우신 어머니 손에 이끌려 옆 동네에서 서당을 하시던 성하순成夏順 선생님 문하에서 [천자문千字文]을 배웠고, 선생님 돌아가신 국민학교 5학년까지 방학 때마다 [계몽편啓蒙萹], [명심보감明心寶鑑] 등을 배웠다.
불교와 유학儒學을 모두 공부하기 위해 동국대 철학과에 진학한 후, 국문과 이종찬李鍾燦 교수님의 지도를 받으며 유학儒學 한문을 공부하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40여 년 동안 불교는 가보지도 못하고 유학과 성리학性理學에 빠져서 헤매고 있다. 동양철학 전공자들을 힘들게 하는 것은 동양철학은 개념 정의가 불분명하고 논리적으로 일관성이 없다는 것이다. 1980년대에는 서양철학적 방법을 도입하여 동양철학을 해석하려는 시도들이 많은 호응을 얻었다. 1학년 전공수업에서 논리학을 배우고 나서 뛸 듯이 기뻐한 적이 있었다. 이것으로 동양철학을 이해하고 정리하면 될 것으로 생각했지만 나중에 맞춰보니 맞지 않아 크게 실망한 적이 있다. 그런데도 서양에 유학을 다녀온 분들이 서양식으로 동양철학을 해석해야 한다면서 많은 논문과 저서를 쏟아냈다. 그러나 본인이 보기에 그런 시도가 동양철학을 바르게 이해하기보다는 오히려 상당히 왜곡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 서양식으로 동양을 보는 것이 가능하다면, 반대로 동양식으로 서양 보기도 가능할 것으로 생각하면서 먼저 동양을 바르게 이해하려고 노력하였다. 이에 서양철학이 선입견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서양철학을 멀리하는 한편, 여러 철학자를 섭렵하기보다 대표적인 주자철학朱子哲學을 중심으로 문제에 접근하는 것이 더 효율적일 것으로 생각하며 긴긴 세월 동안 주자朱子 성리학에 매달렸다.
박사학위 논문은 주자의 리기설理氣說을 주제로 하면서 도입부에 체용론體用論을 간단하게 도입하여 방법론으로 사용하려고 하였다. 그 과정에서 체용론이 간단하지 않음을 깨닫고, 전체 주제로 확장하여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 1992년에 ‘주자의 체용이론體用理論에 관한 연구’로 학위를 취득하였지만, 아직도 미흡한 부분이 너무 많아서 그것을 바로 책으로 출판할 수 없었다. 그 후 연구를 거듭하여 9년 뒤인 2001년에 ‘주자 체용이론의 체계와 그 운용’이란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때 완성된 것으로 생각하였는데, 다시 검토해 보니 아직도 더 연구할 것이 있었다. 그동안 학계에 알려진 체용 개념과는 큰 차이가 있었고, 나의 이론도 아직 거칠었다. 그래서 이것을 천명설天命說, 리기설理氣說, 태극설太極說, 심성설心性說 등에 차례차례 적용해 보면서 체용이론을 검증하고, 동시에 주자 성리학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런 시도는 그동안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이었다. 선행연구를 찾아보아도 방향이 너무 달라서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게 헤매는 과정에서 조금씩 정리되기 시작하였다. 체용이론과 성리학, 유학이 맞춰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지난번 논문 발표 후 19년 뒤인 2020년에 그동안의 연구 성과를 정리하여 ‘논어에 적용된 체용논리體用論理와 음양론陰陽論’이란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동안 체용이론을 어느 정도 이해하면서 성리학을 이해하고 체계화하는데 절대적으로 큰 도움을 받았다. 공자孔子나 맹자孟子가 말한 것도, 주자가 성리학을 체계화한 것도 모두 체용이론과 체용논리를 따른 것이었다. 체용이론을 적용하니 비로소 주자철학과 공맹 유학이 잘 보이기 시작하였다. 서양식으로 동양철학을 재해석하려는 많은 시도가 있었지만 결국 실패한 원인도 여기에 있었다. 생각하는 방식, 말하는 방식, 논증하는 방식이 서로 달라서 소통하기 어려웠다. 이제 상대의 논리를 알면 서로 대화할 수 있을 것이다. 또 굳이 동양철학을 서양식으로 해석하려고 애쓸 필요도 없고, 반대로 동양식으로 서양철학을 해석하려고 할 필요도 없다. 동서양 철학이 각자 장단점을 가지고 있으므로 우리는 그것을 융합하여 미래의 인류 행복을 위해 노력하면 되는 것이다.

세종이 한글을 창제하고 맨 처음 그것을 시험하기 위해 지은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앞부분에 나오는 말이 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흔들리므로 꽃 좋고 열매 많나니!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아니 그치므로 내(천川)가 되어 바다에 가나니!”
이것은 체용론과 체용논리를 이용한 표현이다. 뿌리 깊음은 체體이고, 바람에 흔들리지 않음은 용用이다. 이는 체용론의 원칙을 적용하여 체와 용의 관계를 서술한 것이며, 이를 근거로 꽃이 예쁘게 피고 열매가 많이 열릴 것이라는 추측은 체용논리이다. 또 이것을 뒤집어 보면, 태풍에도 나무가 뿌리째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고 뿌리가 튼튼하다고 판단하는 것은 현미론顯微論이다. 조선朝鮮의 건국은 태조太祖 혼자만의 힘으로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선조들의 공덕이 많이 쌓여서 된 것이며, 이것은 뿌리 깊은 나무와 같으므로 앞으로 무궁하게 발전할 것이라는 추측이다. 한편 달리 생각해 보면, 당시 백성들에게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자랑하려면 체용론에 입각하여 뿌리가 매우 튼튼하다는 것을 밝힐 필요가 있었다.
우리 조상들은 이렇게 체용이론과 체용논리를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녹여내어 사용하였다. 뿌리 부분이 본부/본점이고 가지와 잎은 지부/지점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 ‘본부’가 많았는데 지금은 대부분 ‘센터(center)’로 바뀌었다. 이것은 단지 영어식 표현이 좋아서가 아니라 사유 방식이 체용론에서 형식논리학으로 바뀐 것이다. 만일 센터를 우리말로 번역하려면 ‘중심中心’이 아니라 ‘본부’가 되어야 한다.

요즈음 자동차 회사에서 자율주행차를 개발하려고 한다. 그런데 거기서 사용하는 기계학습 등에서는 사람이 설계한 방식이 아닌 컴퓨터가 스스로 연구하여 찾아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한다. 그런데 서양의 형식논리학으로 정의된 ‘사람’, 즉 ‘이성적 동물’은 도로 위에서 찾을 수가 없다. 우리도 운전하면서 저기 ‘이성적인 동물’이 가니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하거나 말한 적이 없다. 그 다음 방법은 직립보행直立步行, 즉 반듯이 서서 두 발로 걸어가는 사람을 찾으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정의도 완전할 수 없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다양한 모습의 사람 사진을 대량으로 보여주면서 사람인지 아닌지 구별하는 공부를 스스로 하라고 한다. 본질本質을 찾는 서양 형식논리의 한계를 느끼며 컴퓨터에 교육하는 것을 포기하고, 인공지능을 가진 컴퓨터가 알아서 해보라는 것이다. 이제 컴퓨터가 갈 곳은 체용논리학일 것이다. 이것이 엄마가 일일이 가르쳐 주지 않아도 어려서부터 스스로 터득한 방식이다. 어린 아기 눈에 비친 사람의 모습, 그런 모습을 가진 사람의 행동양식 속에서 사람을 알아냈고, 그 속에서 그렇게 생긴 이유, 그렇게 행동하는 원인 등을 생각했다. 이를 통해 그것이 사람인지 알아내고, 사람이므로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 예측하면서 살아간다.
우리는 체용이론에 맞춰 일상생활을 한다. 체용논리는 자연의 섭리와 일치하는 자연 논리학이기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 논리가 아니면 단 하루도 살 수 없다. 물론 그것이 체용이론이라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 채.... 그런 논리가 있는 줄도 모른 채.... 이것을 이론화⋅학문화하려는 것이 체용이론이고 체용논리학이다. 이것을 이해하면 동양의 많은 것이 보인다. 이것을 활용하면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많은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두 누님의 희생이 있었고, 두 남동생의 도움도 컸다. 병든 시부모 수발하며 아들딸 기르느라 고생한 아내 오경숙님에게 이 자리를 빌려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그리고 건강하게 잘 자라서 나라의 역군이 되어 가고 있는 응구⋅혜구에게도 고마움을 전하며 앞으로 더 많은 발전이 있기를 빈다. 끝으로 30년 동안 항상 새로운 모습으로 곁에서 나를 응원해준 우리 윤촌인倫村人에게 감사한다. 모든 윤촌인의 무궁한 발전을 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 건강하게 남은 임무를 완수하도록 노력할 것을 다짐하며...
2022년 가을 청야재晴野齋에서
지은이 윤용남尹用男 삼가 쓰다
2022/12/21 도서출판 학고방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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